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차 바르바리 전쟁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18세기에서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[[지중해]] 일대에는 여전히 [[바르바리 해적]]이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. 이들은 [[유럽]]의 상선들을 습격해 납치한 뒤,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다.[* 쉽게 말해서 21세기의 [[소말리아]] 해적하고 같다. 다만 [[영국]] 국적선은 건드리지 않았는데, 영국 국적선을 건드렸다가는 '''당시 세계 최강 [[영국 해군]]이 출동해 그야말로 초토화를 시켜줬기 때문에''' 악명 높은 바르바리 해적들도 영국 국적선은 건드리지 않았다.] 이들은 단순히 상선만 터는 수준이 아니라, [[지브롤터 해협]] 너머 [[북해]]의 [[아일랜드]]와 [[아이슬란드]]는 물론이며 심지어 [[대서양]]을 횡단하여 [[북아메리카]]의 해안가 마을을 틈만 나면 침략해 주민들을 납치하는 글로벌 [[해적]]들이었다. [[미국]]이 독립하기 전에는 [[13개 식민지]] 선박들도 영국 국적선으로 인정을 받아서 [[바르바리 해적]]들의 납치를 면할수 있었지만, [[미국 독립 혁명|미국이 독립한 후]]로 바르바리 해적들은 신생국 미국의 국력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미국 선박들을 납치해 몸값을 뜯어냈다.[* 당연히 [[영국 해군]]은 이러한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다.] 당시 미국은 신생 국가로서 나라 재정이 열악한 형편이라 제때 몸값을 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. 때문에 1796년 바르바리 해적과 [[트리폴리 조약]]을 맺어 미국 정부와 바르바리 세력간의 우호 관계를 확립하는 대가로 미국 국적의 선박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보장을 받았다. 하지만 바르바리 해적은 이후에도 조약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미국 선박들을 나포했다.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, [[미국]] 정부는 [[윌리엄 베이브리지]]를 사절로 보내 요구 금액에 겨우 모자라게 맞춘 돈을 들려 바르바리 해적을 통제하는 [[지중해]] 파샤들과 협상을 시도했다. 그러나 파샤들은 종주국인 [[이스탄불]]에 가서 협상하라는 핑계로 회담을 피했다. 결국 베이브리지는 이스탄불까지 가서 [[오스만 제국]]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오스만 제국이 입항을 거부한 탓에 결국 [[성조기]]를 내리고 오스만 제국 깃발을 달아 입항하는 굴욕까지 맛봐야 했다. 협상이 통하지 않자, [[미국]]은 자국민 안보에 위협을 느껴 [[미합중국 해군|해군]]의 창설 및 군비 증강에 나서게 되었다. 그렇게 창설된 함대를 지중해로 파견해 상선들을 보호하고 해적과의 협상을 거부하는 강경책을 피자 바르바리 해적들도 "미국 선박은 납치하여도 돈을 안 준다"라면서 잡아둔 포로들을 노예로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. 이렇게 미국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던 때에, 1801년 5월 14일, [[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]]의 파샤인 유수프 카라만르(Yusuf Karamanlı)[* [[알바니아]] 출신의 [[오스만 제국]]의 세력가로 [[트리폴리]]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군주다.]가 트리폴리에 있던 [[미국]] [[영사관]]의 [[성조기]]가 걸린 깃대를 칼로 베어서 성조기를 쓰러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. 마침내 분노한 미국은 이 사건을 '''미국에 대한 모욕'''이라 간주하며 트리폴리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켰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